"오늘로 편집자를 그만두려 합니다.

그만두려 하니 자연스럽게 시작이 생각나네요. 편집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게 해준 동녘 출판사와 이건복 사장님, 무엇보다 제 사수이자 팀장이었던 당시 이정신 과장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 윗선에서는 학벌 좋은 다른 사람을 뽑고 싶어 했는데, 이정신 과장께서 저를 뽑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고 들었습니다.

동녘에서 만 2년 조금 넘게 일했을 때, 이 회사에 계속 있으면 나 혼자 발버둥 치더라도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지금까지 만들었던 것들보다 더 좋은 것들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이직을 적극 모색하던 중에 때마침 이직을 제안해 편집자로서 시즌2를 열 수 있게 해주신 김형보 어크로스 대표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공식적으로는 파국이 뻔히 보이는 말도 안 되는 동녘의 ‘부사장’ 인사 강행에 반발해서 퇴직하고 쉬다가 취직한 거였지만). 그러고 보니 어크로스로의 이직이 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스카우트였네요,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크로스를 그만두는 게 아니라 편집자를 그만둔다는 걸 명백히 해두고 싶습니다. 편집자로서 단기적으로 가졌던 목표 가운데 하나가 전 주요 일간지 서평코너 1면과 온라인 4대 서점 메인을 장식하면서 1만 부 이상 팔리는 책을 만들어보는 거였는데, 비록 제가 기획한 책은 아니지만 어크로스 와서 만든 《지혜롭게 나이 드는 것》으로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었네요. 또 동녘에서 기획했던 걸 이직하면서 가져온 것이고 작가의 힘이 컸긴 하지만, 제가 만든 책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은유 작가님의 《다가오는 말들》도 그대로 동녘에 머물면서 만들었더라면 (물론 여전히 편집의 측면에서 만족 못하는 아쉬운 점이 있긴 하지만) 지금 같은 퀄리티와 지금 정도의 판매량을 담보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어크로스에서 일하면서 제 평생의 콤플렉스를 떨쳐 버릴 수 있었습니다. 제 평생의 콤플렉스는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거였는데, 어크로스에서 일하면서 쉼과 휴식의 경계 없이 일 생각만 해보기도 했고(물론 이렇게 계속 많이 생각하는데 도대체 왜 더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건지 더욱 스스로를 탓하게 되기도 했지만), 도저히 줄일 수 없을 것 같던 잠도 줄여가며 일해보고 평생의 콤플렉스를 없앨 수 있었습니다. 대표께서 직원들에게 조금의 권위도 내세우지 않고 직원들 눈치 보면서 수평적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며, 이윤이 많이 나면 직원들에게 골고루 크게 나누는 등 회사를 합리적으로 운영하시고, 매의 눈으로 유능하고 다정한 동료들만 모아두신 덕분에 오로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동료들에게 업무적으로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러 회사를 다녀본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루트를 통해 출판계에 대한 정보를 꽤 많이 갖고 출판계를 씹어대던 1인으로서, 어크로스는 출판사 중에 다니기 좋은 회사 상위 1%에 든다고 생각합니다. 회사가 괜히 잘 돌아가는 게 아니겠지요(그러니까 출판계 종사자분들은 어크로스에서 구인하면 주저하지 말고 지원해보세요...).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즐겁고 힘들고 행복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벌써 3-4-5-6년차가 되었고, 경력은 쌓여만 가는데 왜 더 완벽하게, 능숙하게, 신속하게, 주도적으로, 전략적으로, 빈틈없이, 섬세하고 꼼꼼하게 일하지 못하는 거냐’고 스스로를 비난하고 의심하고 다그치면서 괴로움이 다른 모든 것들을 점점 압도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책 만드는 게 두렵습니다. 엄밀히 말해 책 만드는 게 두렵다기보다는 책 만드는 저를 비난하는 제가 두렵고, 다시 일하게 되었을 때 그 과정을 반복하지 않을 자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저 스스로는 제 삶을 포기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의학적으로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과 다름없어 2년 내에 언제 세상을 떠나도 이상할 게 없는 마당에 남은 삶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괴로워하며 보내기보다는 저 자신과 제 아내, 저희 고양이들에게 집중하고 서로 의지하고 보듬어주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 천성이 게을러 임금노동 자체를 잘 견디지 못하던 사람이기에 아무 생각과 고민 없이 계속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일하다 죽는 거 진짜 멋없고 별로잖아요.

원고 걱정 없이 의미도 매출도 놓치지 않는 좋은 기획 꾸준히 잘해내고, 어떤 책을 만들든 독자와 언론, 업계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늘 5천 부 이상은 팔고, 때때로 몇 만 부씩 팔리는 베스트셀러를 척척 만들어내는 유능한 편집자가 되고 싶었는데, 그것도 다 과한 욕심이었던 것 같고, 그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건강을 유지하면서 더 오래 편집자로 살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유능한 편집자가 되어보고 싶어서 올해는 ‘편집자에게 유능함이란 무엇이며, 편집자의 전문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제대로 정리해보고, 그걸 갖추기 위해서는 뭘 공부해야 하는지 스스로 찾고 업계 선배들께 물어가며 뜻 맞는 동지들을 모아 함께 공부해보려고 했는데, 그냥 몽상으로만 남겨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제가 만든 책을 구매해주시거나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만든 책들을 되돌아보니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만들고 싶은 책들이 많네요. 이런 후회가 든다는 건 그동안 성장했다는 증거일 테니 그걸로 약간의 위안을 삼아봅니다. 만든 책 중에 잘 못 만든 책이 많고, 심지어 너무나 치명적인 오류를 저지른 책도 있네요. ㅠㅠ 특히 2017년에는 회사가 종수로 매출을 커버하기 위해 저한테 너무 많은 일감을 몰아주는 바람에 일하기 싫고 힘들어서 더더욱 그랬던 거 같은데요... 제 사정이야 어쨌든 간에 믿고 원고 맡겨주셨던 저역자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대표님들, 주간님들, 편집장님들 부디 편집자 1인에게 1년 6종 이상 몰아주지 마시고, 그 이상 몰아주셨다면 타율에 대한 기대라도 낮춰주세요...).

그리고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제안해놓고, 계약해놓고, 혹은 일부 진행까지 해놓고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타이틀들이 있는데, 해당 타이틀들과 관련해서 저역자 선생님들께 너무 죄송스럽고, 제가 못다 한 일을 떠맡게 될 동료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아직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작가님과 다루고 싶은 주제도 많고, 습관처럼 매일 들어가는 온라인 서점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신간 목록을 보면서 ‘내가 만든 책도 지금 저기에 있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후배 편집자와 팀을 이뤄 일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 또 기획하고 편집한 책 한 번쯤 외국에 수출도 해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책을 만들어 내놓고 난 뒤에 그 책에서 자신이 어떤 좋은 영향을 받았는지 독자들이 정성스럽게 써준 서평이나 독후감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이것들도 다 욕심일 거라 욕심을 완전히 버리고 저는 이제 한 사람의 독자로서 책을 유희와 사유의 도구로서만 대하며 살겠습니다. 부끄럽게도 일하는 동안 저 스스로가 괜찮은, 좋은, 잘하는 편집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일로 인연을 맺은 모든 저역자 선생님들, 동료분들, 선후배분들, 외주자분들, 에이전시 관계자분들, 미욱한 저와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기회 닿는 대로 일일이 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편집자로 일하는 동안 100권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겨우 25권 만들고 은퇴를 하네요. 2015년 1월부터 2020년 5월까지 제 생명력 일부를 떼어내 5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만들어낸 스물다섯 권의 책이 절판되지 않고 오래 살아남아 꾸준히 사랑받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제가 만든 책들보다는 제가 훨씬 더 오래 살면 좋겠고요. 언젠가 금방 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들 때, 즐겁고 행복한 마음만으로 책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을 때, 만든 책을 들고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까진 아래의 책들을 사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